권오훈 (19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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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권오훈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남도지부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북 달성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1년 1월 대구에서 흑인 미군 병사에게 피살되었으며, 당시 흑인 병사들은 강도, 살인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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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훈 (1911년) | |
---|---|
기본 정보 | |
![]() | |
출생 | 1911년 |
사망 | 1951년 1월 26일 |
직업 | 정치인 |
배우자 | 김정자 |
자녀 | 권혁주 권태주 |
학력 |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졸업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무소속 |
선거구 | 달성군 |
당선 | 제2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
2. 생애
권오훈(權五勳, 1911년 ~ ?)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남도지부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2. 1. 독립운동과 정치 활동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남도지부 부위원장을 역임했다.3. 사망 사건
1951년 1월 31일, 권오훈은 대구에서 한국 전쟁에 파병된 미군 흑인 병사에게 피격당해 2월 2일 사망했다. 당시 대한청년단 단장 김용덕과 함께 귀가하던 중 흑인 병사 2명이 유부녀를 납치하려는 현장을 목격하고 이를 제지하려다 변을 당했다.[1] 범인들은 본국에서 중범죄자나 밀입국자 신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1]
3. 1. 사건 발생
1951년 1월 31일 오후 7시 30분경 대구시 한청로에서 권오훈은 대한청년단 단장 김용덕(유도 5단)과 함께 귀가하던 중, 부녀자의 비명을 듣게 되었다. 흑인 병사 2명이 한 유부녀를 겁탈하려 납치하는 것을 보고 이를 만류하던 중, 흑인 병사들이 김용덕이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요구하였다. 권오훈은 수행원에게 자신의 권총을 나중에 줄테니 우선 저들에게 주라고 하였고, 김용덕은 총을 겨누고 있던 흑인 병사를 유도 실력으로 던지고 혼자 도주하였다. 권오훈의 왼쪽 아랫배에 총을 겨누고 있던 흑인 병사가 칼빈 총을 발사한 후 도주하였고, 김용덕은 근처에 살고 있던 권오훈의 비서(김영제)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1] 김영제는 권오훈의 장남을 데리고 현장으로 달려가 종로 해성병원으로 이송하였으나, 2월 2일 새벽 사망하였다.[1]이들 흑인 병사들은 대구 명덕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 전쟁 파병 미군 병사들로, 무단이탈하여 사고를 낸 것이었다. 이들은 본국에서 사형수, 무기수, 수십 년 형이 확정된 자들과 밀입국자들이라고 알려졌다.[1]
3. 2. 사망과 사회적 파장
1951년 1월 31일 오후 7시 30분경 권오훈은 대구시 한청로에서 대한청년단 단장 김용덕(유도 5단)과 함께 귀가하던 중, 흑인 병사 2명이 한 유부녀를 겁탈하려 납치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제지하려 했다.[1] 흑인 병사들은 김용덕이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요구했고, 권오훈은 나중에 자신의 권총을 주겠다고 말하며 김용덕에게 권총을 넘겨주라고 했다.[1] 김용덕은 총을 겨누고 있던 흑인 병사를 유도 기술로 제압하고 혼자 도주했고, 권오훈의 왼쪽 아랫배에 총을 겨누고 있던 다른 흑인 병사가 칼빈 소총을 발사한 후 도주했다.[1] 김용덕은 근처에 살고 있던 권오훈의 비서 김영제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 김영제는 권오훈의 장남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가 권오훈을 종로 해성병원으로 옮겼으나, 권오훈은 2월 2일 새벽 사망했다.[1]이들 흑인 병사들은 대구 명덕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 전쟁 파병 미군 병사들로, 무단으로 이탈하여 사고를 낸 것으로 밝혀졌다.[1] 이들은 본국에서 사형수, 무기수, 수십 년 형이 확정된 자들과 밀입국자들이라고 알려졌다.[1]
4. 가족 관계
5.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순번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제헌 국회의원 선거 | 1대 | 국회의원 | 경북 달성군 | 무소속 | 10,869표 (29.22%) | 2위 | 낙선 |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2대 | 국회의원 | 경북 달성군 | 무소속 | 8,172표 (16.92%) | 1위 | 당선 | 초선 |
5. 1. 제헌 국회의원 선거
1948년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북 달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10,869표를 얻어 29.22%의 득표율을 기록, 2위로 낙선하였다.선거명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제헌 국회의원 선거 | 무소속 | 10,869표 (29.22%) | 2위 | 낙선 |
5. 2.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권오훈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북 달성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8,172표(16.92%)를 얻어 당선되었다.선거명 | 순번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2대 | 국회의원 | 경북 달성군 | 무소속 | 8,172표 | 16.92% | 1위 | 당선 | 초선 |
참조
[1]
웹인용
월간조선, 6·25중 拉北된 국회의원 78명을 외면해 온 대한민국 國會
http://monthly.chosu[...]
2007-08-31
[2]
웹인용
매일신문, (독자와 함께)맏아들 권혁주 씨 56년 '통한의 세월'
http://www.imaeil.co[...]
매일신문사
2007-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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